약사

제주향교는 태조 원년(1392) 관덕정에서 동쪽으로 1리(400m) 정도 떨어진 가락천의 서안에 위치한 교동에서 창건되었다. 이후 5차례 이건과정을 거치고 순조 27년(1827) 이행교(李行敎) 목사 때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다. 애초 경사지형에 맞추어 ‘홍살문, 외삼문, 명륜당, 대성전, 계성사’로 이어지는‘전학후묘(典學後墓)’의 배치였으나, 제주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영역이 축소되고 명륜당이 대성전 남쪽에 건립되면서 현재의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가 되었다.


『태조실록』 태조 3년(1394) 3월 27일, 제주에 교수관(敎授官)을 두어 제주 토관(土官) 중 10세 이상의 자제를 입학시켜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자격을 주자 요청하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상소에 ‘제주는 일찍이 학교를 설치하지 않았고 자제(子弟)들이 나라에 들어와 벼슬하지 않은 까닭이라’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조에 실린 김처례의 비문에는 ‘태조 원년 임신에 학교가 세워지고 세종(世宗) 17년 을묘(1435)에 향교가 다시 지어졌다’는 기록을 통해, 태조 당시 제주에 향교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당시 이미 제주의 유생(儒生) 수는 2백여 명이었으며, 이 해 4월 11일 예조(禮曺)에는 제주에서의 문선왕석전제(文宣王釋奠祭) 의식과 한라산제(漢拏山祭) 의식에 대한 절목을 조정에 올리고 있다. 이로써 향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묘가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인종(仁宗) 5년(1127)에 왕명(王命)에 “제주에 학교를 세워 교육의 길을 넓힌다.”라고 했으니 그 당시에 주(州)에는 군현(郡縣)이 있었으므로 보다 많은학교(鄕校)가 세워졌다고 할 수 있겠다. 예종(睿宗) 때 학제(學制)가 정비되고, 이때 신라(新羅)의 국학(國學)이 향교로 변하게 되었다.


제주도는 충렬왕 21년(1291)에 탐라(耽羅)를 제주(濟州)로 고쳐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두었고, 공민왕 18년(1369)에 김세봉(金世奉)을 안무사(按撫使)로, 공민왕 23년(1374)에 김중광(金仲光)을 만호(萬戶)겸 목사를 둔 것을 보면 이때 제주(濟州)가 주(州)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朝鮮) 건국과함께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정하여 중앙에 성균관(成均館)과 더불어 지방에 향교(鄕校 : 校宮)가 주현(州縣)에 세워지게 되었다. 유생의 수는 부목(府牧)에 90人, 도호부(都護府)에 70人, 군(郡에 50人, 현(縣)에 30人을 두었다.


제주의 석전제는 각 도의 계수관(界首官)의 예에 따르고 한라산제는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예에 따라 여러 사전(祀典)에 기재하고 봄·가을에 제사 지내게 한 것이었으며, 7일 뒤인 4월 18일에는 제주목사의 요청에 따라 기존의 교수관 외에 따로 교수관을 제주향교와 정의(旌義) · 대정(大靜) 두 향교까지 합해 세 곳에 더 파견하였다.


세종 17년(1435)에 안무사로 내려온 최해산에 의해 제주향교는 중건되었고,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춘추(春秋)』·『주역(周易)』·『성리대전(性理大全)』등의 책이 각 두 권씩, 『소학(小學)』은 10권씩이 제주의 향교에 내려지기도 했다. 이후제주향교에서는 『소학』을 중요시 하여 일반 예절과 웃어른 공경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김처례(金處禮)가 지은 비문(碑文)에 따르면 성화(成化) 병술년, 즉 세조 12년(1466) 봄, 제주목사겸 절제사 이유(李由)가 퇴락한 향교의 모습을 보고 판관(判官) 이인충(李仁忠)과 의논하여 크게 수리하였으며, 송나라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를 향교의 교칙으로 내걸고 유생들을 가르쳤다.


중종 12년(1517)에는 제주목사 문계창(文繼昌)이 제주에서 벌어진 기근과 역병을 보고하면서 전라도의 미곡 및 당약재(唐藥材) 지원과 함께, 향교의 책이 오래되어 너덜너덜해졌으므로 『효경(孝經)』과 『소학』 및 사서(四書)의 보강을 요청하였다. 중종 31년(1536) 제주목사 심연원(沈連源)이 향교의 명륜당을 개축하였다.


선조 15년(1528) 제주목사 김태정이 가락천 동쪽의 고령전으로 이전하였다. 선조 23년(1590) 역병이 제주를 휩쓸고 간 뒤로 해마다 제주에 흉년이 들었다. 임진왜란까지 겪고 난 뒤인 선조 33년(1600)까지 제주 백성의 2/3가 사망하는 등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군역(軍役)에 올릴 장정이 모자라게 되자,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은 향교 교생을 모아 학문을 시험하여 순(純)이나 조(粗) 이상은 교생의 원액(元額)에 충원시키고, 제주목과 정의현에서 불통(不通), 즉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교생 108명을 가려 군역에 충당하게 하기도 했다.


현종 9년(1668) 제주목사 이인이 향교를 예전의 자리로 다시 옮겼으며, 경종 4년(1724) 향교에 화재가 일어나 향교 건물들이 소실되자 제주목사 신유익은 다시 가락천 동쪽의 예전 자리로 이전하였다. 영조 17년(1754) 목사 조명집이 향교의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순조 27년(1827) 관예(官隷) 고상신(高相信)이 부지를 내놓아 제주목사 이행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편 영조 때의 제주향교는 한양의 성균관과 같은 133위를 모신 대설위(大說位)로서의 규모와 기능으로 성장해 있었고, 당초 동·서무에 중국 현이 94위를 봉안하다가 1951년 매안하여 대성전에는 유교 오성과 공문 10철 그리고 송조 6현 또한 아국 18현으로 39위 위패를 모시고 계성사는 오성의 선대위위패를 모시고 있는 중설위로서 ‘삭망과 ’이팔상정일‘에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다.


영조 50년(1774) 제주 유생들이 서울의 성균관과 같은 계성사를 제주향교에도 지어줄 것을 연명으로 순찰어사에게 청원한 지, 80년이 지난 철종 5년(1854)에야 결실을 보게 되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된 갑오개혁 이후 향교는 학교로서의 기능이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총독부도 제주의 향교를 없애려 하여 대정과 정의 두 개의 향교는 폐교되었지만, 제주향교는 제주지역 유생들의 반대로 끝내 없애지 못했다.


1925년 7월 12일 제주지역 유지 20명 등이 제주향교에서 ’제주축구단‘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지역 교화와 결속 운동을 하였다.


1951년 11월 제주유림 총회에 의해 ’제주대학원‘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제주대학 효시(嚆矢)이다.


1952년 5월 27일 도립 초급대학(2년제) 인가를 받았고, 1953년 11월에 용담동 (현재 사대부고 제주향교 땅 제공)에 캠퍼스를 신축하여 1955년 4월 6일 4년제 단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지금 삼성초등학교 자리인 옛 제주제일고등학교 뒷뜰에 맨 처음 향교가 세워졌을 때 세워졌던 근학비(勤學碑)가 있었는데, 이 비는 현재 한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근학비로써 중요한 가치가 있었지만, 비바람에 글자는 마모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이 비는 현재는 노형동에 위치한 제주제일고등학교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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